깔끔한 하얀색 간판 아래, 투명한 유리문을 열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이어집니다. 한 걸음씩 그 계단을 오르면, 은하수 다방의 문이 열립니다. 11월 26일, 의정부동에 위치한 LP 카페 ‘최혜정의 레디오’는 2023년 하반기 백만원 실험실 ‘은하수 다방 그때 그 오빠’의 은하수 다방이 되었습니다. 분위기 있는 조명 아래에서 사람과 음악, 공간이 어우러져 향수를 자극했던 그날의 현장을 글로 담았습니다. 오후 다섯 시, 은하수 다방이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신미희 실험지기는 가장 앞 테이블에 앉아 속속들이 입장하는 손님들을 반겼습니다. 악수와 포옹이 한창인 그 옆, 디제이 테이블 앞에는 최초의 팝송에 관한 책이 놓여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디제이, 일명 ‘인석 오빠’의 소장품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관리한 듯한 고운 책의 표지를 바라보다, 디제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은하수 다방의 ‘인석 오빠’는 단정한 캐주얼 정장 차림으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미리 적어 온 멘트를 확인하고, 말씨를 고치고, 벽면을 가득 메운 수많은 LP 판 사이에서 원하는 음악을 찾으며 고심했습니다. 은하수 다방의 첫 곡은 살바토르 아다모의 <사랑은 당신처럼>. LP가 재생되는 자글자글한 소리가 쌀쌀한 11월의 마지막 일요일을 장식했습니다. “썸타던 오빠랑 아무것도 안 하고 이 노래만 같이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올드팝 세트리스트 사이에, 은하수 다방 손님들의 사연을 담은 신청곡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한 손님은 이선희의 <겨울애상>에 담긴 추억을 풀어냈습니다.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그저 노래 한 곡을 같이 듣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고 떨렸던 소녀의 추억. 문득, 은하수 다방의 손님들의 지난 시간이 궁금해졌습니다. 70년대, 80년대에는 어떤 소녀, 어떤 소년이었을까요? 그런 궁금증을 읽기라도 한 듯, 한 테이블은 소녀처럼 두 손을 모으고 박수를 치면서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곡이잖아, 정말!” 연신 감탄하면서, 이선희의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콧노래까지 더해진 그곳은 그렇게, 점차 만남의 광장이 되어 갔습니다. 조금은 한산했던 은하수 다방은 점차 사람들을 만나러 온 손님들로 북적거렸습니다. 테이블마다 국화차, 유자차 등의 음료를 마시면서 오랜만에 본 친구와 즐겁게 이야기하며 그동안의 삶을 공유했습니다. 어떤 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며 소소한 다과를 즐겼고, 어떤 이는 분위기에 취해 호탕하게 웃으며 맥주를 비웠습니다. 대화가 끊이지 않는 틈 사이로는 익숙한 올드팝과 한때를 주름잡았던 한국의 가요들이 턴테이블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이런 노래가 있어야지!”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울려 퍼지는 순간,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습니다. 순식간에 흥이 오른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흥겹게 춤을 췄습니다. 머뭇거리는 친구의 팔을 끌고 세우고, 먼저 나선 사람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 춤꾼들 옆에는 그들을 영상 속에 담는 카메라맨들이 있었습니다. 영화 <써니>의 한 장면처럼, 나팔바지와 화려한 패턴의 셔츠를 입고서 무대를 휘어잡 것만 같은 모습이 연출되었습니다. 익숙한 노랫말, 익숙한 멜로디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삼삼오오 모여 분위기에 심취했습니다. 물론, 자리에 앉아서 까딱까딱 고짓으로만 리듬을 맞추는 손님도 있었습니다. 저처럼요.그 사람들 사이에서 저도 조금씩 은하수 다방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가고 있을 무렵, 은하수 다방의 원래 사장님, 최혜정 레디오의 최혜정 님께서 따뜻한 보리차를 건네주셨습니다. 그 덕에 함께 짧은 담소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곳은 요즘 20대들도 많이 와요. 판 음악 들으러. 신기하잖아. 그런데 이렇게 내 또래 사람들은 진짜 알지. 다 아는 음악들이지.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최근 LP 음악을 들었던 경험을 상기했습니다. 영어로 적힌 메뉴판, 감성적이지만 불편한 인테리어. 별다른 소통 없이 그 공간에서 생소한 LP 음악을 ‘들어 본’ 기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은하수 다방은 달랐습니다. 디제이와 사람들이 함께 LP 음악을 통해 소통하며, 그 공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정이 느껴졌습니다. “좋죠?” 역시, 손에 닿은 온기만큼이나 따뜻한 대화였습니다.필름 카메라, 빈티지 의류, 그리고 LP 음악까지. 아날로그와 레트로가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지금, 과거의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은 이제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시간의 때가 묻은 것들을 요즘의 트렌드에 맞춘, 새로운 모습으로 만날 수 있죠.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해 본 세대에게는 조금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누리던 것이, 그들의 시간이 그들의 것이 아닌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은하수 다방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그들의 것’을 온전히 만나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문화를 공유한 사람들의 시간이 오래도록 간직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은하수 다방이 참, 마음에 들었거든요. * 특별 부록 [은하수 다방 선곡 리스트] * 순번 제목 – 가수 1 L’amour Te Ressemble – Salvatore Admo 2 Honesty – Billy Joel 3 겨울애상 – 이선희 4 사랑이 지나가면 Pt. 1– 이문세 5 사랑하는 이에게 3 – 정태춘 & 박은욱 6 All For The Love Of A Girl – Johnny Horton 7 Polonaise – Jon & Vangelis 8 은지 – 배따라기 9 장미빛 스카프 – 윤향기 10 Yesterday Once More – Carpenters 11 倩女幽魂 – 장국영 12 미련 – 장현 13 김성호의 회상 – 김성호 14 광화문 연가 – 이문세 15 어쩌다 마주친 그대 – 송골매 16 Brother Louie – Modern Talking 17 I’m Gonna Give My heart – London Boys 18 Harlem Desire – London Boys 19 Molina –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20 Last Christmas – Wham! 21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 – Glenn Medeiros 22 Without You – Harry Nilsson 23 불놀이야 – 옥슨’80 (Oxen’80) 24 그대에게 – 신해철 25 Step By Step (The C & C Vocal Club Mix) – New Kids On the Block 26 Don’t Look Back in Anger – Oasis 27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 Mariah Car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