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샘_최혜영 창작자 인터뷰

마르지 않는 샘 _ 최혜영 창작자 인터뷰 누구에게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이 있다. 자라온 동네의 풍경을 보는 것, 낯선 곳에서 맡게 된 익숙한 향기 같은 것들. 최혜영 창작자에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감각은 ‘맛’이었다. 음식을 매개로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글로 다시 써내려가는 작업을 하는 최혜영 창작자를 지난 11월 17일, 가능동에 위치한 우리가치떡 카페에서 만나보았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최혜영이고요, 나이는 61세고요. 우리동네 협동조합 이사장이고, 우리가치떡 카페에서 떡을 만들고 있어요. 먹거리에 관심이 많고, <나의 창작노트>는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서 지원을 하게 되었어요. 호기심이 많아요. Q. 글을 그러면 꾸준히 써오셨던 걸까요? <나의 창작노트> 사업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조금씩 썼죠. 의정부가 문화도시로 지정이 되면서 문화재단 사업을 간접적으로 들었는데 아이디어가 튀고, 참신한 사업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홈페이지에서 봤죠. <백만원실험실>, <사이공간> 같은 사업들을 유심히 보다가 우연히 <나의 창작노트> 사업을 발견했어요. 확 당겼죠. 왜 당겼냐 하면 원래 제가 83년에 대학을 들어갔어요. 젊었을 때 꿈이 작가, 또는 의사였는데, 대학을 인문계열 국문과에 들어갔죠. 문학 서클에 들어가서 활동을 했고. 그런데 그 시절, 1980년대가 격변기였잖아요.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학교를 그만두고 사회 운동하고 살다 보니 글을 쓸 기회가 직접적으로 있진 않았어요. 제가 쓰는 글은 주로 유인물, 선동물, 보도자료 같은 거였죠. 페이스북이나 활동하던 단체 게시판에서 글을 썼어요. 그렇게 일상적으로 쓰는 것을 해왔고, 몇 년 전부터는 소설을 쓰고 싶긴 했어요. 저는 동두천에서 살았는데, <나의 창작노트> 사업에 내기로 한 글이 <턱거리와 걸레빵>이에요. 저는 동두천, 기지촌이라는 특수한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동두천 광암동이 ‘턱거리’거든요. 마을 이름이. 어렸을 때부터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 전쟁의 상처가 많이 있는 동네에서 성장을 했고, 가정사도 특이해서 그런 것들을 쓰고 싶었던 게 내재되어 있었어요. 소설을 써보자고 생각했는데 글쓰기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쓰기 강좌 같은 것들을 사이버로 수강했어요. 그렇게 훈련을 하다 연장선으로 사업에 신청해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든 거죠. Q. <턱거리와 걸레빵>이라는 글을 작업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글은 에세이일까요? 아니면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소설인가요? 소설까지는 안 갔고 자전적인 경험을 담은 에세이에요. 오늘(인터뷰 당일, 11월 17일) 마감이어서 결과보고서, 창작노트를 내고 왔어요. 글 쓰고 싶은 욕구는 있는데, 소설을 쓴다고 하면 부담이 있잖아요. 올해 봄에 지리산에서 하는 ‘책 먹는 부엌’ 프로그램이 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인문학, 먹거리 강좌를 진행해요. 거기서 셰프들이 쓴 책을 가지고 강의도 하고, 책에 나오는 음식을 만들어서 우리가 같이 먹기도 하고 얘기를 나누는데. 박찬일 셰프가 쓴 책이 있어요.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그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떠오른 거죠. ‘내 추억도 맛하고 연결되어 있는데, 먹거리와 연관이 되어있네?’ 그래서 제 어린 시절의 자전적 에세이 소재와, 먹는 것이 늘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그것과 연계해서 기획을 하고 에세이를 써보자, 이렇게 잡은 거예요. 처음에는 시리즈로 기획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턱거리와 걸레빵>이고, 언니의 갈비탕, 이모가 마신 동치미 국물, 아버지와 꽃게탕 이런 게 있는데 다 그 사람의 인생사랑 엮인 거예요. 지금 완성한 거는 <턱거리와 걸레빵>, <언니가 사준 갈비탕> 그 두 가지를 어느 정도 완성해서 냈고, 나머지는 다 미완성이에요. 그 이야기들이 다 아픈 이야기예요. Q. 이런 아픈 이야기가 소재가 된다면, 글을 쓰면서 저는 치유도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글을 쓰면서 그런 과정도 겪으셨을까요? 글쓰기는 치유죠. <턱거리와 걸레빵>은 재밌게 쓰긴 했는데 <언니의 갈비탕> 같은 건 그 당시 미군들에게 성매매를 하던, 옆에 세들어 살던 언니가 송월관 갈비탕을 사줬던 것. 그런 사연을 쓴 거죠. 그런 사연들이 엮여있으니 그걸 쓰면서 이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어요. 영감이 생기기도 하고 구체적인 상황들이 기억이 나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중간에 글쓰기를 했던 게 치유가 되었던 것 같아요. 특히 글쓰기의 맥락이 여성들의 삶에 대한 게 있죠. 이게 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 그 당시 70년대 동두천 턱거리라는 기지촌에 모여든 사람들의 기구한 삶이 다 묶여있는 거죠. 특히 그 안에서 힘겹게, 가난하게 살았던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거고. 송월관 갈비탕 이야기는 성매매 여성이 아이를 뗄 때마다 우리 막냇동생을 데리고 가서 그 갈비탕을 사줬는데 그 이야기를 쓴 거예요. 열 번 정도 아이를 지웠다고 해요. 그런 거라든가, 이모의 동치미 국물 같은 것도. 우리 이모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서 나중에 죽어버린다고 연탄가스를 피워놓고 잤는데 동치미 국물을 먹고 깨어났지. 그런 이야기. 쓰면 쓸수록 옛날 생각이 더 처절하게 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5~6개 완성해서 문집처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시간에 쫓겨서 못했어요. 두 가지만 어느 정도 완성을 한 거고. 사실은 소설 감이죠. 턱거리. 왼쪽은 최혜영님이 거주했던 집,오른쪽은 에세이에 등장할 주니어 이모네 집 턱거리 미군부대 앞 캠프호비 정문이미지 제공 : 최혜영 창작자님 Q. 그러면 글을 처음으로 쓰겠다고 생각하신 건 언제예요? 대학에 들어가서 문학 서클에서 활동하셨다고 했는데, 그즈음인가요? 대학 들어가기 전이죠. 10대 후반. 사춘기 때부터 책을 되게 좋아했던 것 같고, 10대 후반에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집안도 힘들고, 엄마도 아프고, 사학비리에 연루된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원래 들어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아파서 못 들어가고, 살림하고 그러면서 고민을 많이 했던 시절이었어요. 실존주의 소설에 파묻혀 살았죠.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회복하고 그러면서 그때 글쓰기의 욕구가 컸던 것 같아요. Q. 그때 읽었던 책 중에 혹시 기억에 남는 책들도 있을까요? 감동적으로 읽었던 책은 고미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 일본의 전쟁, 제국주의 때 일본군 병사로 나가서 겪었던 아픔을 그린 책이에요. 그게 기억이 남고, 내 열아홉 살을 잡고 있었던 건 카뮈의 『이방인』. 그 책에 많이 빠져있었고. 또 대학 들어가서는 판도가 확 바뀌었죠. 그때는 격동기여서 사회문제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와서 그것도 읽었고, 중고등학생 때는 한국 단편소설, 삼중당 문고 책을 되게 좋아했어요. 지금은 책을 되게 못 읽어요. 눈이 잘 안 보이기도 하고 일이 많아지면 책을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 독서를 못 하는데, 책을 되게 많이 읽긴 했어요. 대학 가서 읽었던 건 장편 대하소설 이런 것도 기억에 남고,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은 조정래의 『아리랑』, 개인적으로 『태백산맥』보다 좋더라고요. Q. 작업을 하실 때는 주로 혼자 작업을 하시나요? 작업하실 때의 루틴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글 쓰는 데 제일 좋은 건 뭐냐면 일단 산책을 해요. 걷는 걸 좋아하는데. 저쪽 뒤에 직동공원, 북한산 둘레길이 여기에서 가까워서 1시간이면 한 바퀴 돌거든요. 걸으면 머리에서 생각이 막 떠올라요. 그리고 그게 좀 정리가 돼요. 그걸 잊어버리기 전에 쓰자는 생각이 들어서 컴퓨터에서 쓰죠. <나의 창작노트> 사업을 하면서는 숙제를 해야 하니까 그런 게 있었고. 글은 한 번 써놓고 굉장히 많이 만져야 하거든요. 손을 계속 보고, 틀렸나 안 틀렸나 계속 읽고. 후속 작업이 계속 필요한 거라 자주 봐야 되는 거죠. 보고, 생각하고, 고치고. 제가 생각할 때는 고치는 게 70%인 것 같아요. 얼마나 잘 손을 보느냐. 가게 운영하시면서 글을 쓰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시작을 못 했던 것 같아요. 둘 중에 하나만 해야 해. 시간과 노력을 더 들여서 집중을 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안 나니까 그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더 신경을 쓸 걸, 시간을 많이 들일걸.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장사하다 보니 바빠서 쉽지 않거든요. Q. 창작하는 과정에서 영감이 떠오르는 부분을 여쭤보고 싶은데, 작가님 같은 경우에는 기존의 기억들에서 그런 영감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아요. 사실 영감이 떠오르는 건 기존의 기억보다는 그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좀 쉬고 놀면 영감이 떠올라요. 어떤 계기가 있을 때 이렇게 떠오를 때가 있어요. 이전에 쓴 글이 경향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어요. 그때 당에서 활동할 때였는데, 부대표 후배가 목숨을 끊었거든요. 그런 상황이 생겨서 너무 가슴이 아픈데, 그걸 글로 승화시켰던 거죠. 그런 계기나 상황, 환경이 생기는 것 같은데 그런 건 예기치는 않아요. 저는 그래서 조금 창의적인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너무 바쁘고 정신없고 삶에 찌들면 잘 안 떠오르고 그래요. 그리고 혼자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Q. 작가님이 그럼 글을 쓰실 때, 창작과정에서 유독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글을 쓰다 보면 언어의 부족함을 느끼죠. 언어와 문장, 도구가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글을 쓰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그건 이제 시간과 환경의 문제도 있겠죠. 책을 접하고, 정보를 접하고, 창의적인 환경이 필요하고 이런데 숨 가쁘게 일하고 활동하고 이러면 그걸 놓치는 거죠. 그 부분이 제일 필요한 것 같아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또 혼자 있어도 너무 노동에 지치면 그런 사색을 하기보다는 쉬고 싶죠. 아무튼 쉽지 않아요. Q. 그럼 그런 쉽지 않은 상황이 닥쳤을 때 극복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무지하게 노력하는 스타일이에요. 원래 호기심하고 열정이 되게 많은 성격이어서 장시간 일을 하면서 글도 쓰고 그러고는 있어요. 그리고 일하면서도 짬짬이 사색해야 하니까 한 시간씩 시간 빼서 나가서 걷다가 오고. 책도 좀 보려고 하고. 그리고 좋은 영감을 주는 사람들을 만날 필요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 <나의 창작노트> 중간공유회나 팀 만나고 했을 때는 그런 게 좋더라고요. 서로 영감을 주는, 자극을 주는 네트워크여서 그런 게 되게 좋았어요. 문화예술 쪽 하시는 분들이 정말 다양하더라고요. 젊은 분들도 많고. 의정부 곳곳에서 다양하게, 다양한 층이 활동을 하고 있구나 느꼈죠. Q. 창작노트 사업에 참여하기 이전에도 창작과정이나 일상에 관한 기록을 꾸준히 하시는 편이었나요? 어떤 방식으로 창작 과정을 기록하고 계신가요? 창작과정을 기록하지는 않고요, 생활 글은 계속 썼어요. 띄엄띄엄. 그게 약간 힘이 된 것 같아요. 블로그에 쓰기도 했고. 페이스북에 쓰기도 했고. 자료로 갖고 있기도 했고. 워낙 살아온 경험이나 이력이 독특해서 그럴 때마다 글들을 쓰긴 했죠. 이번 <나의 창작노트>는 과정을 기록하는 거여서 독특하긴 했는데 손으로 쓰는 거라 불편해서 많이는 못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좀 알겠더라고요. 글을 쓸 때 사전 조사, 인터뷰도 하고, 또 다음 단계를 조사하고, 글도 쓰고 수정하고 이런 과정,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 필요하구나, 계속 이런 과정들을 밟아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오늘 작가님 만나 뵙고 이야기 나누면서 창작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었어요. 제 또래 세대 같은 경우는 저희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작가님의 글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작가님과 비슷한 연배이신 분들은 그 시절을 좀 회상하는 동시에 작가님의 특수한 경험도 접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작가님 창작물의 매력은 또 어떤 점인지 궁금합니다. 일단 소재가 되게 특수하죠. 저는 63년생이니까, 어린 시절을 아까 말한 동두천에서 보냈잖아요. 그 시절 한국전쟁 이후를 겪은 게 우리 부모 세대인데 동두천 기지촌이 형성되던 즈음에 거기에 실향민들이 대거 모여서 경제활동을 하면서 서로 살게 돼요. 70년대 미군기지 주변은 되게 컸어요. 다른 지역은 먹을 게 없어서 굶기도 하고, 농촌이 쇠퇴해가던 시기였잖아요. 서울로 올라오고 도시가 형성돼서 공장 생활을 시작하고 이런 시절이었는데, 그 시절에 동두천은 매우 다른 지역과 다른 특수한 환경이었죠. 미군기지 주둔으로 인해서 군부대 내에서 모든 먹을 것과 물자가 빼돌려져서 의정부의 부대찌개 같은 것도 만들어내고. 걸레빵도 그런 거거든요. 미군 부대 안에서 먹다 남은 빵 쪼가리들을 모아서 밖에서 유통하고 먹는 거예요. 그 시절에 우리는 빵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사실 근데 요즘 먹는 샌드위치, 케이크 같은 것들을 그때 먹었던 거죠. 초콜릿도 그 시절 한국 사회에서는 없었던 건데 거기서만 먹었고. 그런 문화도 되게 독특하죠. 그다음 늘 동네에서 미군이 돌아다니고 성매매 여성들과 동네에서 같이 살고. 그 부분도 특수하고. 우리 엄마, 아버지 직업 같은 것도 특수한데 아버지는 또 이북에서 내려오신 분이었어요. 동두천은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이 살았거든요. 반공주의도 되게 강했고. 그 안에서 우리 또래들. 옆집, 뒷집 또래들이 다 그런 사연을 갖고 있어요. 걸레빵 관련 인터뷰를 하면서 썼는데, 그 기억들을 갖고있는 거죠. 그 공간 안에서의 기억들. 그 소재는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소재다. 이게 하나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그리고 제 개인의 삶도 굉장히 큰 소재예요. 어떻든 그 안에서 엄청 가난한 시절을 보냈고, 아픈 엄마를 돌보던 시절이 있었고, 대학에서 학생운동, 데모, 노동운동 하다가 의정부에서 최초로 지방선거에 출마하기도 하고, 협동조합에서 떡을 만들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어서 이게 매력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관찰을 굉장히 잘하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글쓰기에 관찰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세밀한 관찰. 지금은 성격이 무뎌지긴 했지만 상황을 관찰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장점이 있어서 그런 부분들도 매력인 것 같아요. 이전에 턱거리 삼거리 버스정류장이 있던 곳 최혜영 창작자가 살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미지 제공 : 최혜영 창작자님 Q. 작가님은 어릴 때 동두천에서 자라셨는데, 지금은 의정부에서 창작을 하고 계세요. 이번에 새롭게 문화도시로 지정된 의정부에서 창작을 한다는 건 어떠신가요?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전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에 가면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잖아요. 그러면 동두천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부끄러워서. 천두동이라고 했어요. 서울처럼. 서울은 ~동이라고 끝나니까. 그렇게 얘기했던 게 동두천은 기지촌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워낙 평판이 안 좋으니까 그랬던 게 기억이 나요. 대학 문학회에서 처음 글을 쓴 것도 제목을 동두천이라고 쓴 것 같아요. 그런데 쓰고 나서 문학 서클 선배한테 혼났어요. 수필을 쓰랬는데 보도자료를 써왔냐고. 그런 기억들이 있고 저는 변방에 대한 차별, 차별에 대한 저항감이 되게 강해요. 그리고 지역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문화예술인에 대한 지원뿐만이 아니라 노동, 자본이 모두 서울에 집중되어 있죠. 의정부에 오게 된 건 대학을 그만두고 80년대 중반부터 여기에서 노동운동을 했어요. 그때부터 활동 기반이 의정부가 됐고, 거의 고향이 된 거죠. 그리고 의정부 또한 기지촌이었던 과정이 있어서, 동두천 이야기를 쓰는 것이 낯설지 않았어요. 의정부의 아픔도 그렇고, 동두천의 아픔도 그렇고 기지촌이라는 도시의 특수한 상황을 보면 역사적 맥락을 같이 하기도 하니까요. 또 떠나온 다음에 보니까 턱거리 협동조합이 턱거리의 문화를 기록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부분도 새로웠고, 창작노트 취재하면서 살던 집에 가보고, 사진도 찍고.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두천 후배들하고.동두천에서 80년대에 동두천시 대학생회 활동을 많이 했는데, 그때가 되게 희한했던 것 같아요. 30명 정도의 젊은 커뮤니티가 대학생회 운동을 하면서 동두천에서 엄청난 활동을 했었거든요. 연극도 하고, 저항운동도 하고, 사회과학 서점도 운영하고. 그 서점에 제가 점원이었고. 그런 것들도 기록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잊혀졌지만. 동두천 사람들, 젊은이들은 그런 걸 잘 모르지. 아카이빙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Q. 작가님이 창작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속에 끌어안고 있는 걸 내보이고 싶은 것 같아요. 나만 알고 있고, 나만 경험했고, 나만 응어리져있던 것들을 표출하고 싶은 것 같아요. 그래서 위로받고 싶은 것도 되게 큰 것 같아요. 글이 치유이기도 하고, 위로이기도 해요. 나에게 주는 위로. 공감받고 싶은 것도 있죠. 페이스북에 쓰면 ’좋아요‘가 달리면 좋잖아요. Q. 작가님 삶에서 예술을 빼고 창작자님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제 별명이 옹달샘이거든요. 끊임없이 샘이 솟아서. 호기심이 많고, 기획을 하는 걸 되게 좋아해요. 그래서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걸 좋아해요.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Q.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저는 <나의 창작노트> 사업이 되게 좋은 것 같아요. 꼭 프로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아마추어라도 도전할 수 있잖아요. 저는 예술이나 문화가 특별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술적 재능, 예술 활동을 누구나 한 가지씩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조건이나 환경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나의 창작노트> 사업이 그런 것들을 촉발하고 자극하는 데 영향을 줘서 좋은 것 같고, 이런 게 지속됐으면 좋겠어요. 예술은 사람을 충만하게 해주잖아요.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신을 ’옹달샘‘이라고 표현한 최혜영 창작자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올해 치러진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필적 확인란의 문구, 양광모 시인의 <가장 넓은 길>의 한 구절이다. 내면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적어온 최혜영 창작자와 같이, 우리 안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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